
종언의 침묵
블랙스완 : 엠치 / 아케론 : 류 / 사진사, 표지디자인 : 미지종언의 침묵
기억의 잔해가 서리처럼 내려앉은 행성
대기는 오래전 멸망한 문명의 마지막 비명이 결정화된 빛의 입자들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 풍경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검은 외투 끝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녀의 손은 여전히 칼집 위에 얹혀 있었다.그 순간—
부드러운 발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다가왔다.
자줏빛 드레스 자락, 고요한 미소. 블랙스완이었다.
“어머”그녀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냈다
“이번엔…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아케론은 짧게 시선을 던지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블랙스완은 그 무심함을 마치 흥미로운 표본을 보듯 바라봤다.
“페나코니에서의 당신… 여전히 잊히지가 않아.아케론은 무반응이었다.
“페나코니에서도 느꼈어. 당신 속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걸. 기억의 정원이 탐낼 만한, 진귀한 무언가.”블랙스완은 천천히 아케론 주위를 맴돌았다. 자줏빛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움직임은 마치 먹이 주위를 도는 맹금류 같았다.
“궁금하지 않아? 당신 자신 속에 뭐가 있는지. 아니면…”
그녀는 살짝 웃으며 손끝으로 허공을 그렸다.

“혹시… 당신도 모르는 걸까? 당신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블랙스완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일렁이며 아케론을 향했다. 도발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까 하는데.”블랙스완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일렁였다. 그녀는 손끝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실처럼 가느다란 기억의 흐름이 아케론 쪽으로 뻗어갔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케론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지만, 막아서지는 않았다.“걱정 마. 상처 주진 않으니. 단지…”
블랙스완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당신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살짝 꺼내볼 뿐.”기억의 실이 아케론의 심장 깊숙이 닿는 순간—
블랙스완의 눈이 아주 천천히,
커졌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단순한 ‘없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는 검은 바다, 위도 아래도 없는 심연. 소리도, 색도, 온기도 없는, 완벽히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발을 내딛는 순간, 심연이 움직였다. 검은 물결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블랙스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발밑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심연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차갑고, 무겁고, 질식하게 만드는 공허의 손길이었다.
“이건….”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놓아… 줘…”블랙스완은 속삭였지만, 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그녀를 끌어내렸다.차가운 물이 폐로 밀려드는 듯한 감각,
호흡이 막히는 압박,
그리고—그 한가운데서 번개처럼 번뜩이는 두 눈.아케론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 없는,
완전히 비어 있는 시선이었다.블랙스완의 온몸에 전율이 달렸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기억의 실을 끊으려 했다.손끝에서 은빛 파편이 튀었고,
심연의 손아귀가 천천히 풀렸다.마지막 힘으로 몸을 뒤로 던지자,
그녀의 시야가 폐허의 바닥으로 돌아왔다.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블랙스완의 앞에—
아케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눈빛엔 아무 의문도 없었다.
마치 방금 전 일은 전혀 몰랐다는 듯.블랙스완은 입술을 열었다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심장 속에는 그 공허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었다.

“아무 일도.”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흔들리고 있었다.아케론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칼집이 바람을 가르며 울렸고, 그 울림이 블랙스완의 귀에선 심연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그 공허는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본 자를 반드시 삼키는살아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END






